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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20.

무제

ಇ 작성일 12.30.2018

ಇ 안 사귀는 믿농

 

 

 

    히나세 미도리는 섬세하다. 섬세하다고 할까, 마음이 여리다고 할까. 예쁘장한 외모와 그에 반하는 깊은 저음의 목소리의 갭으로 본인에게 던져지는 무심한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 정도는 그와 어느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좋아할 수 있도록 입학을 결심한 호세키 가오카에서의 경험들과 소중한 에메카레의 멤버들 덕에 그러한 평가들에 조금은 무던 해졌다고 해도, 성우, 하물며 직접 무대에 서는 2.5차원 아이돌 성우 로서의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쏟아지는 평가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악성 코멘트들을 걸러 내고 남은 객관적인 평가들과 칭찬들 중에서도 그의 이 개성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는 날이 없었고, 미도리에겐 여전히 쓰리게 다가왔다.

    때문에 오늘처럼 오디션이 있는 날은 약간의 우울감에 빠지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다를 터였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 아침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최상의 목 상태, 그리고 몇 주간의 준비 끝에 스스로에게도 어느정도 만족스러운 연기력과 함께 도착한 오디션 현장. 미도리는 오늘 오디션은 문제 없이 갈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예측을 했다. 처음 만난 감독이 반갑다는 듯이 건넨 인사에 한 마디를 덧붙이기 전까진. 자네, 듣던 대로 얼굴과 목소리의 조합이 꽤나 개성적이군 그래. 분명 분위기를 풀기 위한 감독 나름의 시도였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개성만을 알 뿐, 그의 눈 앞에서 굳은 소년이 제 개성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 왔는지는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미도리가 처음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나세 군, 히나세 군?"

 

    오디션은 무사히 끝냈지만, 그 감독의 말 몇 마디가 발화점이 된 마냥 미도리의 머리 한 구석에선 어디선가 주워들은, 혹은 본, 자신을 향한 평가들이 터지듯 흘러나와 오디션 장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내내 그를 괴롭혔다. 잊으려고 해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분명 상대는 별 생각 없이 던졌을 한 마디 한 마디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을 갉아먹었다. 기분이 자꾸만 소용돌이로 빠지는 것만 같았다. 익숙해져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많이 견딜 만 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오디션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왜 나는...

 

    "히나세 군,"

 

    훅 가까워진 목소리. 그제야 미도리는 고개를 들었다.

    노아와 미도리의 사이에 놓여있던 책과 프린트들이 어느새 치워지고, 그 자리에 노아가 다가와 앉아 있었다. 분홍빛 눈동자에 담긴 걱정이 다정하다. 그에 비치는 자신의 표정을 발견하기 전에 미도리는 다시 손에 쥐고 있던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 오디션이 조금 힘들었나 봐요" 

    "으, 으응. 아냐... 어디 보고 있었더라?"

    "..."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이 먼저 불러 놓고는 또 이 모양이다.

    어젯밤, 곧 있을 연기수업의 과제로 고민하던 노아에게 먼저 도와주겠다고 한 미도리였다. 외부 일정, 특히나 오디션과 같이 필연적인 첫 대면의 행사가 있는 날의 상태를 아는 노아는 거절했지만, 이번 오디션에 자신이 있던 미도리는 굳이 일정이 끝난 후에 자신의 방에서 같이 연습하자는 약속을 잡았다. 한심하긴... 본인의 컨디션 관리도 못하면서 누굴 도와준다고. 괜히 대본을 노려보았다. 글자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눈썹을 찌푸리며 맨 첫 줄부터 천천히 훑어 내리기 시작한 미도리의 시선을 멈춘 것은 대본을 쥔 손에 가볍게 내려 앉은 노아의 손이었다.

 

    "특대생 씨?"

 

    손에서 팔로, 팔에서 얼굴로 시선을 올려 미도리는 노아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보려고 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이 행동의 저의를 읽으려고 할 틈도 없이, 노아가 그의 목을 껴안은 탓이었다. 미도리는 눈을 깜빡였다. 쥐고 있던 대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감싼 팔의 너머,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디에 떨어졌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의 둘에게는 이미 상관 없는 일이었다.

 

    천천히, 미도리는 노아의 허리에 팔을 올렸다. 허리까지 덮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에 감겼다. 포슬한 재질의 니트로 감싸인 어깨에 고개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자, 언제나와 같은 라벤더의 향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안심되는 향. 눈을 감았다. 말없이 내리는 위로가 규칙적으로 어깨를 도닥인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잔 음이 쿵, 쿵, 나직이 뛰는 심장 소리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그 일렁이는 변화를 가만히 들으며, 미도리는 어린 동물처럼 마주 안은 온기에 뺨을 부볐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귓가에 들리는 작은 숨소리만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속삭이는 듯한 말이 맞닿은 가슴께를 울렸다. 이제는 익숙한 이 진동에 그는 몇 번이나 위로를 받았었는지. 평소라면 이즈음 얼굴의 열을 모른 척하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지금의 미도리는 대답 대신 허리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자신의 무게를 조금 더 기대었다. 짧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더 가깝게 느껴지는, 규칙적이던 심박이 한 숨 건너뛴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본인의 심박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의 긴장이 무색하게, 잠깐 멈칫했던 손은 다시 제 박자를 찾아 그의 어깨를 쓸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날이었다. 분명 이 상냥한 특대생 씨는 그가 놓아줄 때까지 팔을 풀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아는 자신은 영악한 걸까. 낮게 뜬 눈 너머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미도리는 생각했다. 노아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오늘과 같이 남에게서 떨어지는 평가로 울적해진 날에도, 리더로서 충분히 성과를 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날에도, 노아는 항상 그에게 위안이 되는 응원을 보냈다. 그것이 진심임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여서일까, 미도리는 그녀의 앞에서 약해진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낯설었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눈을 감는다. 노아는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다. 지금의 이 포옹도, 그녀 나름의 위안 방법 중 하나였다.  다독이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이 다정함을, 이 자체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괜한 간극에 상처받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만 더, 이대로 있을 수 있도록.

 

히나세 미도리x특대생(사카네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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